타니가와 간 상의 유언 - 그대, 좀 더 미쳐라
무시가 무네히로
새삼스레 말할 것도 없이 나는 연구자도 아니고 타니가와 간 씨에 대해 특별히 잘 아는 것도 아니다.
간 씨와는 그의 만년에 여덟 번 만났던, 말하자면 그뿐인 교류이지만, 내 속에서는 “여덟 번이나 만날 수 있어서, 고마웠다”라는 마음이 사라지지 않는다.
1987년에 쿄토에서 처음으로 만났다. “전설적인 혁명 시인”이라는 평판은 확실히 들었던 바다. 그러나 만나서 이야기해보니, 마치 정신으로 노천 탄광을 하고 있는 광부처럼 느껴졌다. 분명 이상하리만치 으스대는 사람이지만 무방비 상태의 착각으로 가득차* 무엇이든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내 고향인 제방 마을(輪中の村)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2미터 정도 진흙을 세워 올려 홍수에 대비하는 역사를 가진 마을에 대한 이야기.
간 씨는 곧바로 말했다. “일본 마을이 만들어낸 것에 비할 만한 발명, 사상적 달성은 아직 없는 게 아니냐”라고.
‘마을’을 이처럼 잘라 말하는 사람을 나는 여태 보지 못했다.
나는 기뻤다. 물길을 열고[물길의 순환을 좋게 하고], 자연과 인간이 하나가 되어 욕심 없이 만족하는[少慾知足의] 삶을 몇 백 년 몇 천 년 지속시켜 온 것이 마을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마을을 알고 길을 알고
잿빛의 때를 알았다. -「농촌과 시」
간 씨에게는 ‘마을’이 시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부락공동체의 기억이 아직 남아있을 때 그 기록에 깊이 눈 떠, 그 알아차림을 밀고나가 새로운 공동체 만들기의 기초공사로 삼아야겠다고 간 씨는 생각하고 있던 것이리라. 하지만 현실은 엄청난 속도로 진행되어 마을은 파괴되고 붕괴되어갔던 것이다.
간 씨의 명제는 미완인 채 끝났다. 하지만 서울에서 간 씨를 읽는다는 사람이 나타났다. 만일 다시 간 씨의 정신의 바통을 받아든 ‘또 한 명의 타니가와 간이 태어난다면, 명제는 육체화血肉化되는 것은 아닌가 ―.
마지막으로 나가노 쿠로히메산의 간 씨 자택에서 묵게 되었을 때 간 씨가 남긴 구체적인 말을 전하고 싶다. 1993년의 일이다.
대학생 세 명과 찾아갔다. 그들은 론가쿠샤(論楽社)의 홈스쿨(가정학교) 졸업생이었다.
간 씨는 10대인 그들의 고민을 그대로 받아 안을 줄 아는 사람이었다.
한 학생은 아버지와 형이 정신병을 앓고 있었다. 자신 역시도 발병하는 게 아닌지 두려워하고 있었다. 간 씨는 눈에 눈물이 맺힌 채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잘 들어라. 매일매일 거울을 보는 거다. 소중히, 소중히 자기를 바라보는 거다.”라고. ―지금 그는 결혼해 아이가 둘. 복지 일을 하고 있다.
또 한 명의 학생은 “카메라맨이 되고 싶다”라는 상담. “사진은 클로즈업으로 해야겠지요. 슬며시, 힘 있게, 신문같은 데에는 나오지 않도록, 일단은 20년은 계속해주세요. 10년은 안됩니다. 그리고 무시가 아빠처럼 ‘양심파’에게 사랑받는 나약함을 잇지 않도록. 부탁해요”라고. -지금 그는 잡지를 편집하며 사진을 마구 찍고 있다. 18년간 계속해왔다.
저녁 여섯 시가 되니 “슬슬 한잔 할까요”라고 대병(일 홉들이) 정종을 내왔다. 취하도록 마셔 마치 잇쇼우=평생(동음이의어) 꿈인 듯, 사라져갔다.
나를 향해 론가쿠샤의 운영에 대해 “너는 하류川下 일을 하고 싶은가? 아니겠지? 상류川 上 일을 하는 거라면, 먹고 살 수 없다는 건 당연하지 않겠나? 물의 근원水源을 향해 전진하라.” “알겠나? 정말로 먹고살 수 없게 되면 삼림 조합 같은 데서 일해라. 땀도 흘리고. 그런 모습을 지역 사람은 가만히 지켜보고 있다”라고.
그날 밤 그 곳에서 신세를 졌다.
한밤중 2층에서 “우오~ 우오~”하는 소리가 들렸다. 외침소리였다.
다음날 아침 확인했다. 간 씨의 외침과 같은 잠꼬대였던 것이다.
“나는 미친 채 살아왔다. 미치는 것 말고 나에게 무기란 없지 않았던가. 그대도 더 미쳐라.” “론가쿠샤의 일이 걱정된다면, 여이, 론가쿠샤의 일이라면 이제 걱정 끼치지 말라고.”
이런 간 씨의 말은 유언이 될 거라 생각 못하고 그날 아침 헤어졌다.
(번역 유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