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제문이 없었던 관계로 책을 따라 가며 나누었던 이야기들을 책에 밑줄 그으며 정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어차피 해야 하는 일, 기억이나 생생할 때 했었야지...하는 생각이 드네요^^;
224p
<스피노자 표현의 문제>에서부터 다듬어진 유비에 대한 비판은 그 또한 다음과 같은 중요한 결과를 도출한다. 들뢰즈는 모델을 모방하는 복제품이라는 유비적 모델을 문학과 예술에 적용하는 대신, 힘의 포획의 방식을 통해 이 관계를 생성으로 이해함을 보여준다. 소주/주류의 분석이 보여주었듯이, 복제품이 모델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방하는 자에 의해 모델은 창조된다. 모방하는 자는 모델을 주류의 권위로 끌어올린다. 또한 모델에 의해 창조되기 보다 오히려 모델을 구축한다.
--> 이 부분은 들뢰즈가 초월성을 비판하면서 내재성을 이야기 하는데 중요한 부분입니다.
이는 직접적으로는 플라톤의 생각을 비판하는 것으로, 인간과 신으로 놓고 생각해보면 인간은 사본에 해당합니다.
인간중심적 척도를 세워놓고 자연 전체를 위계하는 것이면서 모방하는 자로 인간을 낮추어 놓고, 스스로 복종하는 상황이죠.
재현의 논리가 바로 그런 것입니다. 이에 반하여 들뢰즈는 사본은 원본을 전제하는데 거꾸로 원본은 사본에 의해 만들어 진다는
입장을 제시 합니다.
225p
그런데 모든 신체가 관계의 구성물이라면, 우리 신체에서 다른 신체로 단순한 강도적 변주- 새로운 조우의 실질적 관계에 상응하는 새로운 이것임의 구성을 보증하는-를 통해 이행하는것이다. 즉 이 결합 관계에 앞서 존재하는, 미리 주어진, 독립적인 두 항 사이의 모방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판명되지 않음indistinction의 지대, 즉 생성의 '블록'에 실제로 포착된 항들을 일시적으로 규합하는 이웃관계의 이것임인 조우로 구성된 새로운 신체가 문제이다.
--> 분명 서로 구별되지만 경험적으로 식별하기 곤란한, 그렇지만 실질적으로 구변되는 이질적인 것들을 말하는 것으로
그것이 무엇을 말하는지의 연결(대입)이 중요한게 아니라, 그것들 자체가 뭔가를 만드어 내는 것(이질성의 논증에의해 감응을 만들어
내는 것)이 중요하다는 의미인듯 합니다. 영화에서 몽타주의 예를 들어 보기도 했습니다. (일반적으로 대중영화의 몽타주에서는 느끼기 힘든 감응이지요--;)
순수지각 상태에 빠지면 훨씬 많은 것을 받아 들일 수 있답니다.
-되기가 이루어지려면
이질적인 것들이 결합되어 유지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런 층위에 이르면 인간이 통념적으로 갖고 있는 구분을 넘나들면서 그런건 의미없는 것이 되고 맙니다. (아바타가 생각 나는 대목입니다)
226p
.... 예술의 성공은 강렬한 생명의 기형화- 필연적으로 비유기적인- 속에서 새로운 힘들을 느끼게 하는 이 능력에 의해 평가된다. 왜냐하면 예술의 성공은 만드어진 형태의 층위(유기적 클리셰)에 틀어 박히는 것이 아니라, 힘의 층위(기관없는 신체)에서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더 이상 고유한 의미를 본뜬 무언가의 지시나 비유적 의미를 본뜬 은유의 지정은 없다. 이미지와 마찬가지로 사물은 오직 강도적 상태들의 연속을 형설할 뿐이다. ... 이미지는 이 행로 자체이다. 이미지는 생성이 되었다.
--> ready made한 감정을 만들어 내는 것은 예술이 아니다, 라는 말이 떠오릅니다.
그리고 (우리가 나누었던) 예술에 대한 수많은 정리되지 않은 논쟁들은, 어쩌면 (물론 그러한 논쟁 자체는 유의미하나)
우리가 여기까지 책을 읽으면서, 마치 들뢰즈가 예술의 방법(혹은 해석의 방법)을 이야기 하는 것처럼 받아 들였기 때문아닐까 싶었습니다. 선생님께서 여기서 말하는 건, 예술이 하고 있는 것대 대해 접근하는 2가지 태도. 예술가들이 하고 있는 것들을 어떨께 볼것이냐를 말하는 것이지 해석방법이나 예술 방법을 말하는 건 아니다...라고 말씀하셨잖아요....
238p
붓-먹으로 가시적인 것 visible, 충만함plein을 그리는 일은 어렵지 않다 해도, 비가시적 것 invisible, 빈 공간 vide을 붓과 먹으로 재현하기는 훨씬 어렵다. 산montagne과 물eau 사이에서, 연무의 빛과 구름의 먹빛은 끊임없이 변화한다.
--> 갠적으로 가장 마음에 닿았던 부분인데요. 비어있다는 것은 없는 것이 아니라 뭐라도 될 수 있는 것.
그래서 아직 무엇이라고 할 수 없는 것. 이라는 말씀..... 듣고 보니, 자신에게 희망이 생겨 납니다^^
245p에서 부터-
이미지의 변용을 이야기 하는 부분은, 우선 베르그송이 말한 시간이미지를 이해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베르그송이 말하는 시간은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것입니다. 시간이라는 것이 정지하지 않는 한, 시간을 어떻게 현재와 과거로 정확하게 구분할 수 있을까... 싶은 것이겠죠.
케익 한 조각을 잘라 내면 아래는 빵, 그 위에 생과일, 그 위에 생크림이 올라와 있습니다. 시간을 자른다면 이렇게 조각 안에 층위로 과거-현재-미래가 공존하는 건 아닐까... 라는 상상을 해 보았습니다. 케익을 가로로 잘라서 먹는 사람이 없지 않는 한 말이죠.
암튼. 잠재태와 현재태들이 공존한다는 것
현재가 현재인 순간에 현재는 이미 과거가 되어야 하고 미래가 되어야 한다는 것(미래가 되어 가고 있는 현재겠죠)
서로의 위치를 바꾸어 가며 이행하는 이러한 순환은... 배우가 연기에 몰입하는 것을 생각해 보면 이해가 쉽다고
선생님께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배우는 연기에 몰입할 때 자연인으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잃고 배역이 되어 있다는 것.
그러면서도 다시 자연인으로 돌아 온다는 것. 연기중에 미세하게 양상태를 오가는 것이죠.
배우들을 자연상태(연기가 아닌 상태)에서 만나보면, 그들의 표정이나 행동 말투에서
이전에 맡았던 캐릭터가 느껴질 때도 있더군요. 그런 걸 생각해보면 배우들은 자연상태에서도 이러한 순환이 이루어지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현행적-배역(몰입)
잠재태-자연인
영화에서는 이러한 점을 활용한 장면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데요.
화면가득 보이는 캐릭터의 얼굴. 우리는 실제 그인줄 알지만
카메라가 뒤로 훅- 빠지면 그것은 거울에 비친 상입니다. 거울에 비치는 상은 잠재태이고 실제 내가 현재태인데
우리는 잠재태가 현재태라고 오인한 데서 시작하여 (잠재태인줄 알았던) 현재태가 잠재태가 되는 순간을 목격하게 되는 것이죠.
....
이 뒤에도 무언가 중요한 이야기를 나누었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만. (지성에 대응하는 것: 능동적 자아)
문장으로 완성해 낼 자신이 없습니다. 미흡한 점 사죄드립니다.
예습도 복습도 충분히 못하는 상황이지만, 그래도 나름 제 삶에 꽂히는 무언가를 하나씩 가지고 오게 됩니다.
갠적으로는 그렇게 만족하며 즐거워 했는데, 공론화 시켜야 할 입장이 되니 부족한 점이 너무 부끄럽네요........--;



오호! 꼼꼼한 후기로군요!!! 언제 이렇게 적었어요~
ㅋㅋ세미나가 길어지니 언니가 펜을 놓고 있던데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